[재충전]나를 돌보는 감각을 기억하기

번아웃을 경계하며 틈틈이 쉬어주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게 아닌 것 같다는 자각이 들었을 즈음엔 이미 건강상태가 좋지 않았다. 근본적인 원인을 해결하려면 생활 습관을 바꿀 필요가 있었다. 제때 먹고 자고, 생각을 멈추고, 충분히 쉬어주고, 꾸준히 운동하는 습관을 만들려 노력했지만 쉽지 않았다. 일이 많아지면 운동이 가장 먼저 우선순위에서 밀렸고 몇 년간의 불면증으로 수면 패턴은 엉망이 된 지 오래였다. 내일을 신경 쓰지 않고 푹 쉴 수 있는, 오롯이 나를 돌보기 위한 시간이 필요했다. 외부일정의 영향을 받지 않아도 되는 안식월 동안 집중적으로 건강을 살피고 생활 습관을 고쳐보자고 마음먹었다.


 6월로 예정했던 안식월은 8월로 연기되었다. 코로나 전까지만 해도 이왕의 긴 휴가라면 국외로 나가고 싶었지만, 막상 안식월을 코앞에 두자 일상업무에 긴 공백기까지 대비하느라 야근 러쉬가 이어졌고 목적지가 국내라 다행이다 싶을 지경이었다. 휴가라 쓰고 요양이라 읽는다는 농담을 하며 전날까지 남은 일을 처리하다 출발일 아침에야 짐을 쌌다.


제주에 있는 동안 원 없이 봤던 검은 돌과 바다와 하늘


렌트카를 쓰려던 계획이 틀어져 여느 때처럼 뚜벅이 여행이 되었지만, 다행히 공항에서 숙소 인근까지 바로 가는 버스가 있었다. 한 시간가량 시내버스로 한라산을 가로지르는 경험은 꽤 인상 깊었다. 아침부터 비행시간에 맞춰 움직이느라 정신이 없었는데, 버스 창 너머로 잿빛 구름이 거뭇한 하늘과 울창한 나무들과 그 사이로 얼핏얼핏 보이는 바다를 보다가 문득 실감이 났다. 정말 제주구나.


안타깝게도 그날 제주에는 나 말고도 솔릭이란 애가 함께 도착했다. 여름의 끝물이었고 태풍은 원래 늘 그즈음에 왔으니 여행객이 타이밍을 잘못 맞춘 거지, 뭐. 일주일 내내 강한 비바람이 예보되어 있었고 대단한 일정을 짜둔 것도 아니었지만 아쉬운 건 어쩔 수가 없었다. 28박 29일. 긴 것 같아도 어영부영 늑장 부리다간 순식간에 지나갈 텐데. 허투루 보내면 안 되는데. 서울을 벗어났을 때, 낮시간을 마음껏 쓸 수 있을 때 하루라도 더 햇볕을 쬐며 실컷 걷고 싶은데. 또 마음이 혼자 쫓기고 있음을 자각했지만 시간을 생산적으로 보내야 한다는 강박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그때 우연히 일정이 겹쳐 첫 이틀을 함께 보낸 친구가 말했다. ‘새로운 제주의 모습을 보겠네.’


빗방울 맺힌 하귤. 제주에서 가장 좋아하게 된 싱그러운 풍경


그 말을 곱씹자 곧 태풍이 몰아닥칠 제주에 머물고 있다는 게 신선한 경험으로 느껴졌다. 이미 부슬비를 맞으며 산책 중이었고, 빗방울이 송글송글 맺힌 하귤과 까만 돌담을 구경하며 걷는 건 싱그럽고 즐거웠다. 그러네. 내일은 숙소를 나설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숙소의 큰 창으로 태풍이 오는 제주를 구경하는 것도 새로운 경험일 거야. 따뜻한 차를 마시면서 책을 읽고 요가도 하고 요란한 빗소리 들으면서 낮잠도 자야지. 일주일이나 비가 와도 나는 아직 삼 주를 더 제주에 머물 테고, 이런 여유로운 경험을 또 언제 하겠어?


그리고 다이어리 안식월 페이지에 써뒀던 문장을 떠올렸다. ‘시간 아까워하지 않기.’ 시간을 생산적으로 보내야 한다는 강박을 버리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을 보내자. 시간을 아까워하지 않는 연습을 하자.


다행히 무시무시한 일기예보나 수시로 울리는 재해경보와는 별개로 숙소 주변은 파고가 높은 것 외에 꽤 잔잔하게 태풍을 맞았다. 비바람이 세던 사나흘 정도를 제외하고 매일 바닷가와 한적한 동네 어귀를 끊임없이 걸었다. 걷기를 좋아하는 나에게 도심을 벗어난 제주는 정말 좋은 여행지였다. 어딜 걸어도 바다와 나무와 귤밭이 잔뜩이었고, 애써 고개를 들지 않아도 어디서든 하늘이 보였다. 인적이 드문 고즈넉한 길을 하염없이 걷고 있노라면 신경이 느슨해지는 것 같았다. 걷다 지치면 부둣가나 벤치에 주저앉아 쉬었고, 조용한 카페에서 하귤차나 커피를 마시며 창밖 풍경을 보는 것도 좋았다. 책과 노트를 챙겨 다니긴 했지만 아무것도 안 하고 멍하니 창밖만 볼 때도 있었다.


머리 비우기에 가장 좋은 건 역시 걷기. 힘들게 오르막을 걷다가도 가끔 올려다보면 이렇게 멋진 풍경이 선물처럼 쨘.


사실 초반에는 ‘쉽게 오지 않는 기회와 비용으로 여기까지 왔으니 시간을 낭비하지 않아야 한다’는 강박에 몸을 가만 두기가 어려웠다. 바닥을 기는 체력으로 종일 돌아다닌 덕에 엄청 피곤한데도 잠들 수가 없어 새벽까지 뒤척였고, 일찍 일어나 하루를 길게 쓰고 싶은데 도무지 일어날 수가 없어서 힘들었다.


머리를 비우는 일도 쉽지 않아서 책이나 메모처럼 집중할 거리가 없으면 온갖 생각으로 머릿속이 북적였다. 익숙하지 않은 명상은 그렇다 치더라도 ‘멍때리기’가 이렇게까지 힘들 일인가 싶어 숫제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아니 남들은 불멍이니 물멍이니 하는 게 유행이라던데, 나는 멍하니 시간을 보내는 게 뭐가 이렇게 어렵지? 생각은 어떻게 멈춰야 하는 거야? (그때 머릿속으로 이 결과보고서를 족히 다섯 편은 더 썼을 거다. 아쉽게도 머릿속에서만.)


의식적으로 생각을 비우고, 요가와 명상을 하고, 강박을 덜어내고, 현재에 집중하는 연습을 했다. 반복재생되는 기억들을 끊어내고 ‘서울에 돌아가면’, ‘내일은’ 같은 생각을 멈췄다. 뜻대로 잘 되진 않았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생각이 조금씩 줄어드는 것 같았다. 자연과 가까운 길을 하염없이 걷고 예쁜 풍경을 보는 게 많은 도움이 되었다.


새 취미생활 만들기, 뜨개질. 앙증맞은 모자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화분싸개. (결국 반쯤 풀어서 다시 떴다.)


그렇게 2~3주 정도를 보내고 나니 안식월 말미 즈음엔 수면 패턴이 꽤 많이 좋아졌다. 가로등도 별로 없는 외곽이었기 때문에 해 뜨면 나가서 지칠 때까지 걷다가 해지기 전에 숙소로 돌아와 쉬는 바른생활을 한 탓도 있을 테고, 통창을 통해 한여름 아침볕이 가차 없이 얼굴에 내리꽂히는 침대 위치라던가, 잠들기 전 두어 시간 동안 명상, 독서, 기록, 요가 등을 하며 보내는 저녁 루틴이라던가, 핸드폰 멀리하기라던가(침실에서 와이파이가 안 잡히는 게 꽤 유용했다) 여러 가지가 작동했겠지만, 무엇보다 오늘 꼭 해야 하는 일이 없으니 정해진 시간이 되면 곧장 저녁 루틴을 하고 잠자리에 들 수 있었던 게 가장 크지 않았을까 싶다. 스트레스도 전혀 받지 않았고, 매일 몸을 움직였고, 종일 햇볕을 잔뜩 쬐기도 했고. 며칠째 약을 먹지 않고 잠들었다는 걸 문득 깨달았을 때는 정말로 기분이 좋았다. 이것만으로도 이번 안식월은 충분히 성공적이야!


비록 마지막 주에 한라산 등반을 하겠다던 야심 찬 목표는 안식월의 처음과 끝을 함께한 태풍 덕분에 무산되었지만, 만 보 내외만으로도 바닥나던 체력이 이젠 이만 보도 거뜬해졌고 언젠가 꼭 다시 시도해보려고 한다. 물론 3주 차에 작은 오름을 오르면서 평지를 걷는 근육과 산을 오르는 근육이 다르다는 걸 곧바로 깨달았고 아직 한라산은 무리일지도 모르겠다 싶었지만, 앞으로 계속 운동을 할 거니까!


어딜 가도 그림 같은 풍경이 펼쳐지는데 걷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제주에서 한 달간 시도했던 여러 좋은 습관들은 서울로 돌아온 뒤에도 잘 이어가고 있다. 특히 몇 년간 불면증으로 고생한 걸 생각하면 놀라울 만큼 수면패턴이 좋아졌다. 출근 전 두세 시간 일찍 일어나 명상과 독서, 스트레칭을 하고 집을 정돈한 뒤 아침을 먹고 점심과 저녁 도시락을 준비한다. 야근에 따라온 야식과 외식 등으로 잔뜩 늘어났던 몸무게도 건강한 식사와 운동으로 차근히 감량 중이다. 일찍 일어나는 것보다 밤을 새는 게 쉬웠던 올빼미가 출근 전에 뭔가를 하다니. 아직도 가끔 스스로가 신기하고 대견하다.


여전히 컨디션이 나쁠 때면 한참 동안 잠들지 못하고 뒤척이거나, 일이 몰리면 잠시 루틴이 멈추기도 한다. 하지만 내가 나를 돌보는 감각을 놓지 않고 바쁘고 피곤해도 규칙적인 생활을 최대한 유지하려 노력하고 있다. 처음 신청서에 썼던 것처럼 이제는 주말이 최소한의 피로를 밀어내기에 급급한 시간이 아니라 진짜 ‘쉬는 날’이 되었다. 오랜만에 만나는 사람들에게 좋아 보인다는 얘기를 들을 때마다 어렵게 되찾은 마음의 작은 여유와 안식월이 남긴 건강한 습관들을 계속해서 가져갈 수 있도록, 그래서 내가 좋아하는 일들을 더 오래, 더 건강하게 할 수 있도록 나를 잘 보살피자고 다짐한다. 지치기 전에 (이것저것 재지 말고!) 먼저 잘 쉬어주면서.



글 | 선영 (비온뒤무지개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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