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충전]그래서 나는 또 다른 여행을 준비하고 있다.

유대용
2023-10-13

10대, 20대 때는 여행을 휴식이나 충전으로 생각해 본 적이 별로 없었다. 나에게 휴식은 아무것도 안 하고 잠이나 많이 자는 것이지, 여행과 같이 활동적인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사실 몇 번 가보지도 않았고 그나마도 해외로 여행을 가면 묵언수행을 하기 일쑤였기에 여행에 대한 인상이 좋지 못한 탓도 있다. 그런데 활동을 시작할 즈음부터 생각이 바뀌었다. ‘여행 같은 일상과의 단절의 경험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는 데 원동력이 되기도 하는구나.’ 인권운동사랑방의 상임 활동가로서 첫 출근을 하기 직전 주변의 권유로 여행을 다녀오게 되었는데, 이 짧은 여행이 뭐라고 한 해 내내 여행을 곱씹으며 지냈고, 연말이 되니 어느새 다음 여행을 어디로 갈지 고민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그렇게 7년이 흘렀고 안식년을 맞이했다. 7년의 시간 동안 열심히 활동하면서 동시에 틈만 나면 방방곡곡 여행도 다녔던 것 같다. 이번 안식년에는 좀 더 멀리 가보자는 결심을 했다.

 

숙박비가 이렇게 비쌀 줄이야

목표는 스페인이다. 아니 이‘었’다. 스페인 바르셀로나가 해변도 있고, 날씨도 좋고, 구경할 거리도 많다던데 안식년을 맞이하여 한 달 여행을 하기에는 적절한 곳이 아닐까 싶었다. 사실 유럽 대륙에 가보는 것은 거의 처음이었다. 때마침, 연고지를 프랑스 파리로 옮겼던 축구선수 리오넬 메시가 다시 바르셀로나로 돌아올지도 모른다는데, 그럼 그곳은 그야말로 축제의 한가운데 아닐까. 흐뭇하게 자료를 검색하고 있는데 마침 인권재단 사람의 <일단, 쉬고> 공고가 올라왔다. 이건 사인이다! 빠르게 신청서를 작성했고 얼마 뒤 선정되었다는 연락을 받았다. (이 기회를 빌려 감사합니다!) 기쁜 마음으로 여행을 구체화하기 시작하는데 웬걸? 바르셀로나는 세계적으로 숙박비가 비싼 곳이었다. 특히나 여행을 계획한 8월은 여름 극성수기로, 한 달에 숙박료만 300만 원을 써도 이상하지 않은 물가였던 것이다. 아... 이건 아무리 지원금이 있어도 예산 초과다...게다가 메시도 안 온단다. 

아쉽지만 목표를 수정했다. 한 달 내내 한곳에 머물며 여유롭게 지내기보다는, 해외에 거주해 평소에 만나기 어려웠던 친구들을 만나보는 여행을 하기로 했다. 비싼 유럽의 숙박비를 조금이라도 아껴보고자 저렴한 이동 방법을 통해 친구들의 집을 방문하는 여행 컨셉. 프로젝트 이름도 스페인 한달살이에서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로 바꾸었어야 하는 게 아닐까.



누구와 함께 어떤 시간을 보내느냐에 따라 여행의 모양새는 계속 바뀐다.
 

이번 여행의 또 다른 핵심은 현재를 함께하는 짝꿍과 ‘함께’ 한다는 것이었다. 여행이 좋아진 데에는 사실 짝꿍의 무수한 권유와 시도 덕분이 크다. 여행이 침묵과 묵언의 시간으로 채워지는 것이 아니라 재미와 즐거움, 수다와 이완의 시간이 될 수 있음을 느끼게 해주었기에 긴 여행도 결심할 수 있었다. 그렇게 ‘우리’의 여행이 시작되었고 그 출발지는 런던이었다. 공교롭게도 10년 전 혼자 묵언수행을 하며 여행을 했던 곳도 런던이었다. 혼자 해보고 느꼈던 것을 함께 나눌 사람이 있으니 모든 것이 달랐다. 언어의 한계, 여행이라는 한계를 그저 받아들이던 때와 달리 함께 경험하면서 무엇이 좋은지, 또 아쉬운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니 하루하루가 말 그대로 ‘순삭’이었다. 그렇게 짧은 런던 일정을 마치고 곧바로 친구가 살고 있는 핀란드의 탐페레로 넘어갔다.

탐페레는 넷이 떠들 수 있는 또 다른 장이 펼쳐졌다. 사실 탐페레는 친구들이 아니었다면 들어볼 리 없는 도시였다. 핀란드에서 두 번째와 세 번째를 다투는 규모의 도시라지만 한국의 도시들에 비하면 아주 작고 조용한 동네였다. 친구들 덕에 현지 사람들만 아는 장소를 돌아다닐 수 있었는데, 특히 친구 집 바로 앞에 있지만 발음은 할 수 없는 호수 ‘Näsijärvi’의 풍경은 한반도에서 보기 어려운 풍경이었다. 호수 앞 ‘라흐아니에미’라는 만에 위치한 핀란드식 사우나도 신선했다. 핀란드의 맨체스터라 불리며 제조업의 생산기지였다던 탐페레의 역사를 친구에게 들으며 도시를 살펴보는 과정도 흥미로웠다. 노동자 투쟁을 조직했지만 2차 세계 대전 즈음하여 노동자 투쟁은 패배하고, 핀란드는 독일 나치와 손을 잡고 러시아 백군과 함께 궤를 같이했던 역사를 써 내려갔다고 한다. 그 역사 속에서 탐페레의 수많은 핀란드 남성 노동자의 죽음, 생계를 책임져야 했던 여성 노동자의 출현 등을 살펴볼 수 있었다. 이 모든 이야기가 언어도, 문화도 생소한 곳에서 거주하며 경험을 나누어준 친구들 덕분에 알 수 있게 되는 과정이고, 거대한 역사만이 아니라 도시의 역사를 생각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누구와 함께 어떤 시간을 보내느냐에 따라 여행의 모양새가 계속 바뀔 수 있음을 체감하는 시간이었다.


너무 덥다.. 관광보다는 소통으로 여행하기

유럽의 북동쪽 끝에 있는 핀란드에서 남서쪽 끝에 있는 나라 스페인에 당도했다. 모든 것이 바뀌었다. 가을에서 여름 복장으로, 저녁이면 문을 닫는 것이 아니라 저녁 8시가 되어서야 문을 여는 음식점과 상점들의 풍경, 올려다봐야 눈을 마주칠 수 있는 키 큰 사람들보다는 고개만 돌리면 아이컨택이 되는 친근한 사람들. 스페인에서 만난 일본인 친구와 일본, 한국 같은 동아시아 사람들은 친근하지만 모든 것이 부정확하고, 늦게까지 문을 여는 만큼 시끄럽고 약간 지저분한 스페인보다는, 깔끔하고 쾌적한 북유럽이 정서에 더 잘 맞는 것 같다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럼에도 어쩌랴 나머지 여행은 이 더위와 바다를 즐기는 스페인에 쏟아부은 것을.


40도 더위 속 스페인 여행은 관광보다는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숙소의 브라질이나 네덜란드에서 온 친구들을 사귀고 함께 어울렸던 과정이 더 기억에 남는다. (스페인에서 친구를 못 사귄 것은 조금 아쉽다.) 충분한 소통을 하기엔 언어의 한계가 있지만, 그럼에도 듣고 또 나누기 위해 무언가 애쓰는 것은, 타지에 와있기에 가능한 노력이란 생각이 들었다.


방금 P.T.를 마친 사람처럼 온몸이 저릿저릿

여행을 길게 다녀보니 여행에 대한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휴양 중심이 아닌 여행자로서의 경험은, 외부의 자극에 스스로를 끊임없이 노출시키는 과정이었다. 마치 헬스장 P.T. 선생님을 처음 만나고 ‘어랏, 내가 그냥 팔을 들어 올리고, 다리를 들어 올리는 일도 이렇게 못하는 사람이었나?’ 하며 자괴감이 드는 과정처럼 말이다. P.T.와 여행이 비슷한 점은 이뿐만이 아니다. 책으로 알고 영상으로 알던 정보가 실제 몸으로 부딪히면서 어떻게 구체화 되고, 실현되는지 살펴보고 따라 하는 과정을 겪는 일은 사실 여행처럼 시간과 돈과 에너지를 쓰는 일이 아니면 좀처럼 경험하기 어렵다. 마음만 먹으면 스스로 운동을 할 것 같지만, 결국 비싼 돈을 내고 P.T. 약속을 잡아야만 엉덩이를 떼어내듯 말이다.

그렇게 유럽 여행을 마친 지금의 나는 방금 P.T.를 마친 사람처럼 온몸이 저릿저릿하다. 그래도 이 과정을 시도하고 반복하며 충분히 즐겨보려고 한다. 한 번의 P.T.에서는 보이지 않는, 반복과 누적 속에서 변화된 어떤 모습을 살펴보고 싶은 마음이랄까. 그래서 또 다른 나의 여행을 새롭게 준비하고 있다. 나의 <일단, 쉬고>는 여기서 마치지만, 일단 쉰 덕에 또 다른 힘과 에너지를 얻어 남은 안식년은 충분한 자극의 과정으로 만들어 가려 한다. 그 과정은 또 어떻게 누구와 나누게 될지는 몰라도 지금까지의 여정이 잘 갈무리될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해 준 인권재단 사람에 감사를 전한다.


글 | 유대용 (인권운동사랑방)
편집 | 황서영 (인권재단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