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충전]휴양지에 가면 노는 게 도리라서 좋다

날맹
2021-06-30

“휴양지에 가면 노는 게 도리라서 좋다”


올레길 14코스를 걸으며 보았던 하늘


제주에서 한달의 시간을 보내고 돌아온 서울에서 자꾸 하늘을 찾아 올려다보는 나를 발견한다. 서울의 하늘이 제주보다 더 탁하고 우중충하다고 생각했는데, 며칠 계속 찾아본 서울 하늘은 꼭 그렇지도 않았다. 서울의 하늘도 제법 높고 햇살이 예쁘게 비칠 때가 보였다. 다만 차이는 어딜 가든 굳이 고개를 내뻗지 않아도 하늘을 볼 수 있었던 제주와 달리 서울에선 탁 트인 시야로 하늘을 볼 수 있는 장소도, 올려다볼 시간도 부족하단 점이란 걸 새삼 체감한다.

 

제주에 가며 세운 계획 중 하나는 ‘걷기’였다. 예전에 가봤던 곳에 좋았던 곳, 주변에서 추천해준 곳들을 찾아 열심히 걸었다. 한 시간에 한 대씩 있는 버스 시간에 적응이 되니 일상의 속도도 어느새 거기 맞춰 느릿해져 있었다. 대중교통으로 다니면 기다리고 갈아타는 시간 때문에 여러 곳을 못 보지 않을까 걱정도 처음엔 들었지만, 욕심 안 부리고 하루에 한 두곳 정도만 찬찬히 둘러보는 것도 생각 이상으로 좋았다. 주차한 곳으로 돌아가지 않아도 되고, 걷다가 편의점 테이블에 쉬며 낮술도 할 수 있는 즐거움.

 

일정에 쫓기듯 ‘도장깨기’ 식으로 동선을 짜지 않아도 되는 여유가 좋았다. 내일은 어딜 가볼까 떠오르는 곳이 생기면 검색을 해보고 버스 시간을 찾아본 뒤 얼른 다음 날이 밝기를 설레어하며 잠이 들었다. 내일이 오는 게 기대되는 일상이라니, 낯설지만 반가운 감정이었다. 다음 날 비 소식이 있으면 저녁에 미리 빨래를 돌려놓고, 특별한 계획 없이 머물며 동네 도서관에서 빌려온 소설을 읽으며 빗소리를 듣는 것도 좋았다.

 

비 내리던 날의 자욱한 안개도 기억에 남는다. 육지에서 경험해보지 못한 정말 자욱한 안개였다. 대낮인데도 깜깜해진 안갯속을 걸어보았다. 신기하기도 하고 살짝 무섭기도 했다. 드문 인적, 가끔 지나다니는 차량의 헤드라이트가 시공간의 감각을 흐렸다. 마치 자전거 여행을 가면 힘겨운 언덕 뒤 펼쳐진 내리막을 누리는 것처럼, 흐린 날의 시간을 견디고 나서 맞이하는 맑은 날 햇살이 더 반갑게 느껴졌다. 진한 안개와 눅눅함 또한 적응이 되니 그 시간 나름의 차분함에 젖어들 수 있었다.

 

제주에서 둘러볼 곳들의 동선을 짜는 또 하나의 기준은 채식 식당 리스트였다. 비건이 유행처럼 번지면서 ‘제주 비건 식당’으로 검색하면 인터넷에 뜨는 포스팅들은 예전보다 훨씬 많아졌다. 정보들을 찾아보며 나만의 리스트를 만들었고, 버스를 타고 가서 적당히 걷다가 들러서 먹을 수 있는 곳들의 지도를 그리며 계획을 세우는 재미가 있었다. 물론 어떤 비건 식당들은 ‘인스타 맛집’이 되어버려서, 여행객으로 붐빈다 싶은 곳은 적절히 제외하며 골라서 찾아다녔다. 일종의 ‘비건 택스’가 붙어서 평소라면 메뉴판 가격을 한번 더 봤을 곳이지만 지원금 덕에 편히 먹을 수 있었다.


가파도에서 멀리 보이는 제주 본섬의 모습


“휴양지에 가면 노는 게 도리라서 좋다. 이 세상엔 노는 사람밖에 안 사는 것 같은 착각이 생겨서 좋다.”

- 김소연, 『그 좋았던 시간에』 중.

 

숙소 근처 도서관에 갔다가 우연히 만난 김소연 시인의 에세이에서 발견한 문장이다. “노는 게 도리라서 좋다”는 문장에 머물러 있다보니 ‘이렇게 놀아도 괜찮나’라는 나의 조바심이 보였다. 여러 생각 말고 그냥 지금 시간을 즐겨도 괜찮다는 위로로 받아들였다. 다른 노는 사람들이 부럽지 않도록 나도 충분히 노는 것, 이 세상에 노는 사람밖에 안 사는 것처럼 보이는 건 ‘착각’이라는 걸 인지하면서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충분히 즐길 수 있는 깜냥과 여유. 제주에서 지내는 동안 서울 돌아가면 뭘 하지 생각이 많아지거나 남은 시간이 아쉬워질 때마다 ‘노는 게 도리’를 떠올렸다.

 

제주에서 한달살이를 마치면 어떤 인생의 멋진 통찰같은 게 짠하고 찾아올 줄 알았는데 그런 ‘깜짝쇼’는 없었다. 다만, 바꿔놓은 핸드폰 배경화면 속 제주의 하늘을 보며 그때 즐겼던 여유로운 순간을 떠올리면 제주에서 보낸 시간의 ‘약발’이 더 길게 지속되지 않을까 싶다. 뭔가 생산적인 일을 하고 있지 않다고 불안해하거나 조급해하지 않으며 남은 안식년 더 푹 쉬어도 된다고 되뇌면서 말이다.


글 | 날맹 (인권교육센터 '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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