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온]성평등한 조직문화 만들기

지오
2020-12-16


작년 겨울,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이하 행성인) 성평등위원회(이하 성평위)에서는 한 해를 마무리하며 단체의 조직문화를 점검하는 회원모임을 준비했다. 여름부터 가을동안 각 팀 소모임 등 활동하는 회원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고 그 결과를 발표하는 자리였고, 긴장이 많이 됐었던 것 같다. 성평등, 조직문화 점검은 누구나 필요하다고 말하지만 대부분이 남이 해주면 정말 좋은 것 같은 느낌을 받아왔기 때문에 두서없는 걱정을 좀 했었다. 그런데 막상 하고 보니 무척 좋은 시간이었다. 평등 앞에 완벽한 조직은 없지만 그러한 방향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조직의 모습에 회원들이 감응해주었고 회원들 역시 자신이 속한 문화를 성찰하면서 서로가 평등한 문화를 함께 만들어 가고 있다는 유대감을 쌓는 시간이었다.


그 자리의 감응이 용기를 주었던 것 같다. 조직문화 점검은 매년 해나가야 하는 사업이고 이왕 하는 거면 좀 더 촘촘하고 체계적이면 좋겠다, 재미도 있으면 좋겠다, 더 많은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으면 좋겠다, 다른 단체들도 고민들이 있을텐데 함께 나눌 수 있지 않을까? 등등 꼬리에 꼬리를 물고 바람들이 이어졌고 결국 일은 커지고 말았다.


이분화된 성별을 중심으로 나와 있는 기존의 조직문화점검 자료보다 좀 더 넓게 다양한 정체성의 소수자들이 함께 할 수 있는 조직문화 점검 가이드북을 만들자! 다른 소수자들과 함께 하는 단체들에게도 함께 사용할 수 있도록 범용적인 프로그램을 만들자!


참으로 큰 포부를 품었던 것이다.


큰 테이블에 약 15명이 앉아서 간담회를 진행하고 있다.


이 포부는 첫 자문회의를 마치면서 물음표를 띄우더니 단체 간담회를 가지면서 와르장창 무너졌다. 단체 상황뿐만 아니라 소수자들의 다양한 위치와 조건들을 고려하게 되면서 현실적 제약들을 더 많이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결국 프로그램 전체를 범용적인 활용에 맞추기보다 단체 상황에 맞게 선택할 수 있도록 구성을 변경했다. 그러나 인생만사 새옹지마라 했던가. 선택적으로 사용하도록 하려다보니 키워드별로 개별 프로그램을 만들게 되었고 그 과정은 조직의 구조, 소통, 관계의 문제가 어떻게 권력과 연결되고 조직 내 문화에 스며들어 있는지를 토론하며 각각의 영역을 더 깊이 생각해볼 수 있게 했다.


장장 6개월 동안 벼려낸 과정은 ‘평등하게 함께 해요 – 성평등한 조직문화점검 프로그램 가이드북’이란 이름으로 결실을 맺었다. 그동안 성평위 구성원 6명은 개별 프로그램을 만들기 위해 별도로 작업을 한 후에 2~3주 꼴로 만나서 회의를 했다. 그러면서 정말로 성평등이 얼마나 많은 복잡한 층위를 가지고 있는지 여실히 깨달으며 스스로 고통을 자처한 우리 자신들을 탓하기도 했다. 물론 그 고통의 시간에 배운 것도 많다. 프로그램 내용 자체보다 그것을 통해 나눈 이야기들로 새로운 관점을 볼 수 있었고, 다른 의견들을 맞춰가는 과정에서 여유를 갖는 태도, 때론 너무 조심스러워서 꺼내기조차 두려운 말들의 이면을 살펴보는 다정함 같은 것들을 동료들로부터 배웠다. 가이드북을 통해서 조직문화를 고민하는 다른 사람들도 그러한 기회를 가질 수 있다면 더없이 기쁠 것 같다.


한편, 이런 고민들을 다른 단체의 활동가들과는 충분하게 나눠보지 못했다. 코로나19의 영향으로 일정이 계속 미뤄졌고, 결국 사업조정이 불가피했기 때문이다. 애초 가이드북에는 성평위에서 만든 프로그램에 더해 각 단체들이 이 프로그램을 실행해보고 나눈 후기, 보완해야할 점들, 더 남는 고민과 미처 다하지 못한 이야기들까지 두루 포함하여 여러 활용사례들을 보면서 종국에는 자신들만의 프로그램을 만들 수 있도록 길잡이가 되기를 기대했었다. 


작년 우리가 조직문화 점검을 시도하려 했을 때의 경험으로는 프로그램들을 제시하는 것은 자료들이 거의 비슷한데 이것을 실제 회원들과 했을 때 어떨까, 왜 조직문화 앞에서 나는 한 없이 작아지는가, 무엇이 이토록 어렵게 만드는가, 진행은 어떻게 하면 좋을까, 같은 막막한 두려움을 해소할만 한 사례들이 더 필요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사업 일정이 조정되면서 결국 이런 과정들은 빠지고 가이드북의 내용을 중심으로 단체들의 의견을 종합하는 설명회만 진행하게 되었다. 이점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럼에도 이번 가이드북을 통해 만나게 된 조직문화에 관심을 가지고 함께 고민하고자 하는 활동가들과의 네트워크를 형성할 수 있었던 것은 큰 성과였다.


'평등하게 함께해요'라는 제목의 표지 이미지이다.

△  성평등한 조직문화 점검 프로그램 가이드북 표지


조직문화는 가이드북 하나 만든다고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결국 아쉬웠던 기회는 내년에 실제로 가이드북을 활용하면서 채워나가야 한다. 올해 진행하지 못한 단체별 프로그램 실행은 후속 활동으로 이어갈 것이다. 가이드북을 실제 활용하면서 생기는 고민과 활용사례들을 수집하고 문제의식을 확장시켜 나가면서 운동사회 내의 감수성을 높여가는 것이 이 프로젝트의 궁극적인 목표일 것이기 때문이다. 이번 가이드북 발행은 그 시작을 꿰어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가이드북을 통해 더 많은 단체들과 교류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있는 것도 물론이다.



글 |지오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성평등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