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가는 인권기행을 기약하며

관리자
2020-04-29

2011년 가을, <박래군의 천릿길>이라는 이름으로 보름 동안 인권기행에 나선 적이 있었습니다. 제주도의 4.3사건 현장에서부터 강원도 양구의 분단 현장에 이르기까지, 하루에 두세 군데의 역사적 현장과 투쟁 현장을 방문하는 일정이었습니다. 인권센터 건립을 위한 모금에 도움이 될까 해서 기획한 여행이었는데, 답사를 진행할수록 주객이 전도되어버렸습니다.  


지리산의 한 골짜기에서는 전쟁 시기에 학살당한 이들을 만났고, 합천에서 원폭 피해자들의 사연도 접했습니다. 경남 양산의 솥발산 공원에 묻힌 노동자들을 찾았던 날은 마침 부산 한진중공업의 85호 크레인에 김진숙 씨가 올라간 지 300일에 가까웠던 날이었습니다. 솥발산 공원에는 한진중공업 노조의 박창수, 김주익, 곽재규 열사가 묻혀 있습니다. 김진숙과 민주노조 하다가 죽었던 그 동료들을 만나는 일은 고통이었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묘지를 돌아보면서, 동행한 이들과 함께 울었습니다.  


거창·산청·함양 민간인학살사건 추모공원에서 박래군

 거창·산청·함양 민간인학살사건 추모공원에서 ⓒ이선일


10년 전의 기획, 6년 전의 약속


이 경험을 단발성으로 끝내지 말고 책으로 엮어보자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클 출판사와 함께 2013년 가을부터 틈틈이 사진 촬영을 하며 전국을 돌았습니다. 2014년 하반기에는 책을 내자고 약속을 했지요. 


그런데 2014년 4월 16일을 피해갈 수 없었습니다. 이후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 특별법을 만드는 투쟁과 세월호 참사 1주기 투쟁 등을 주도하다가 감옥에 갇히기도 했습니다. 4.16연대, 4.16재단을 만들고 책임을 져야 했습니다. 일이 넘쳐났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더는 미룰 수 없어서 2년 전부터 다시 집필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역사의 현장을 인권의 시각으로 풀어내는 일에 영 속도가 붙지 않았습니다. 다시 책과 자료를 뒤지고 현장을 찾았습니다. 그렇게 몇 번의 시도와 중단, 재시도, 수정의 과정을 거듭한 끝에 제 책이 세상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구상한 지 10년 만입니다.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이제야 약속 하나 지킵니다. 

 

"우리에겐 기억할 것이 있다." 


이번 책의 주제는 국가폭력-국가범죄입니다. 해방 이후 1987년 6월 항쟁까지 무려 40년 동안 한국에는 인권이 없었습니다. 미국은 이승만 세력을 선택했고 극우 반공주의 국가를 만들기 위해 정치적 반대 세력을 제거해 갔습니다. 1948년 제주4.3과 여순사건을 계기로 국가보안법을 만들었고, 한국전쟁을 통해서 완벽한 반공 분단국가를 만들어냈습니다. 그 과정에서 너무 많은 사람이 학살당했습니다. 가족이 죽었는데 울 수도 없었습니다. 강요된 침묵은 군사정권 시기까지 이어졌습니다. 인권을 말하는 것은 ‘빨갱이’, ‘종북좌파’로 매도되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피해자들이 두려움을 이기고 말을 하기 시작했을 때, 비로소 인권이 서기 시작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자신의 목숨을 던진 이들이 광주 5.18 묘역에, 그리고 마석 모란공원에 묻혔습니다. 민주화의 성지로 여겨지는 곳들입니다. 


이 책에서는 특히 올해 40주년을 맞는 광주 5.18항쟁을 새롭게 조명하고 싶었습니다. 학살자를 처벌하다가 중단한 일로 퇴행적인 정치지형이 굳어졌습니다. 중단된 과거청산을 불처벌(Impunity)이란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처벌해야 할 책임자를 처벌하지 못하면 그 사회의 발전은 왜곡됩니다. 


5.18항쟁에 주역으로 참여하였던 빈민층과 여성들이 여전히 주변부로 말해지는 문제도 말하고 싶었습니다. 시민군의 주력은 지식인도 대학생도 아닌 광주 지역의 하층민들이었는데, 어느새 그들은 사라졌습니다. 여성들은 헌혈하고 주먹밥을 만들어 나르고 가두방송도 했고 시위에도 적극 참여했는데 그들이 당한 성폭력 등의 고통은 최근까지 말도 못 하던 분위기였습니다. 이런 점들을 드러내고 피해자들이 아무런 두려움 없이 말할 수 있어야 하고, 사회는 그들의 말에 경청해야 함을 역설하고 싶었습니다.


함께 가는 인권기행을 기약하며 


역사적인 사건을 잘못 말하게 될까, 인권의 시각이 너무 딱딱하게 보이진 않을까, 책을 쓰면서 두렵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인권은 역사를 이해하는 하나의 기준점입니다. 그리고 역사의 현장에서 고통당한 사람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때 인권은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을 겁니다. 코로나19 상황이 진정되면, 이 책에 나오는 현장으로 같이 가면 좋겠습니다.


이 책의 인세는 모두 인권재단 사람에 귀속되어 인권운동을 지원하는 기금으로 쓰입니다. 많이 사서 읽어주시고, 주위에도 널리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늘 건강히 지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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