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재단사람

모바일메뉴바 후원하기
홍보마당 자료실
  • 공지) [박래군의 사람살이] 새 수첩에 적고 싶은 일
    • 작성일
    • 조회수
    • 447
  • 새 수첩에 적고 싶은 일


    저는 아직 일정 관리를 수첩으로 합니다. 핸드폰의 캘린더 기능을 이용하면 편리하겠지만, 일정 관리만큼은 꼭 수첩으로 하지요. 저의 일정에 관심 갖는 눈들이 많다는 게 가장 큰 이유지만, 핸드폰의 캘린더보다 수첩이 더 정직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한 해 사용했던 수첩을 넘겨봅니다. 참 바쁘게도 살았습니다. 회의, 기자회견, 집회, 지방 출장, 원고 마감과 같은 일로 너무 빡빡해서 중요한 일정에는 녹색이나 노란색 형광펜으로 표시를 해놓았습니다. 악필이어서 남들은 도저히 알 수 없는 글자들이지만 저는 해독할 수 있습니다. 글씨체만 봐도 그때는 어떤 마음 상태였는지도 가늠이 됩니다. 

    수첩을 들여다보며

    수첩을 들여다보면서 수많은 약속을 잘 지키지 못했다는 반성부터 합니다. 그런 자리에는 볼펜으로 지우고, 다시 화이트로 덧칠을 해놔서 잘 안 보이는 것 같지만 저는 알 수 있지요. 왜 지키지 못했을까도 생각합니다. 때로는 둘러대기도 했고 때로는 사정을 하며 미루기도 했습니다. 몇 년째 잡고 있는 책 원고가 가장 대표적인 것이지요. 내년에는 약속을 좀 적게 하고 하나하나의 약속에 충실해야겠다고 생각해봅니다.

    수첩에 적힌 수많은 인연과 관계들도 생각합니다. 어떤 인연은 더 발전한 것 같은데 어떤 관계는 틀어져 버렸습니다. 틀어진 관계 때문에 속상하고, 화가 치밀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봄에는 너무 바빴고, 여름에는 이미 틀어진 관계가 더 심하게 틀어졌습니다. 날 선 말을 뱉어내기도 했고, 그 말이 상대방을 아프게 만들었지요. 내가 아프다 보니 다른 사람들의 아픔에 대해서는 소홀했던 일도 생각납니다. 심한 모욕감에 몸을 떨던 날에는 함께 견뎌준 동료들 덕분에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떠나보낸 친구도, 후배도 있었습니다. 저세상 사람이 되어버린 다음에 국화꽃 한 송이 올릴 때마다 살았을 때 한 번이라도 더 볼 걸 후회가 밀려왔지요. 마음과 몸이 아파서 일을 그만둔 동료들도 생각납니다. 평소 일할 때 너무 무리하지 말라고 말은 하지만 실제로 몸과 마음을 돌보면서 일하도록 배려하지는 못했지요. 이제 50대 후반, 곧 환갑인데도 아직은 부족하기만 합니다.

    새 수첩에 적고 싶은 일들

    부끄럽고 지우고 싶은 관계조차 고스란히 남는 수첩, 수많은 일정 속에서 허우적대었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수첩을 이제 새것으로 바꾸고 다시 일정을 채워갑니다. 먼저 식구들의 생일과 중요한 기념일을 적고, 이미 확정된 연중행사를 적어놓습니다. 1월에 벌써 여러 일정을 적었고 2월에는 총회, 이사회 등 중요한 일정이 들어찼습니다. 그러고는 텅 비어 있는 자리를 봅니다. 저 공간에, 저 시간에 어떤 일들이 들어찰까요? 내년 이맘때에는 그 수첩을 보면서 어떤 반성부터 하게 될까요?  

    새해에는 이런 일들을 수첩에 적었으면 좋겠습니다. 
    총선에서 혐오와 차별, 불평등을 조장하는 데 앞장섰던 세력들이 “폭망”하고 드디어 차별금지법 제정을 위한 좋은 조건의 국회가 만들어졌음을 환영하는 칼럼 쓰는 마감일을, 세월호참사와 가습기 살균제 참사의 진상이 밝혀졌음을 반기는 기자회견을 하는 일정을, 5.18 광주항쟁 40주년을 맞아서 과거 국가폭력에 대해 전면적으로 조사하기로 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새롭게 열린 국면에 대응하기 위한 회의를 한다는 일정을, 갇힌 사람들은 풀려나고 올라간 사람들은 내려오고 해고자들이 원직 복직되어 그들을 만나러 가는 일정을, 산업현장과 재난참사 현장에서 사람이 죽는 일이 현저하게 감소할 수 있게 생명안전법과 같은 안전법제를 발의하는 일정을, 인권활동가들의 지속가능한 조건을 만드는 기금을 선뜻 기부하는 분을 만나는 일정을, 무엇보다 "기후 악당" 국가에서 탈피해서 기후위기 극복을 위해 결단을 내릴 수 있는 행동을 하기로 한 일정을 적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묵은 감정 털어내는 새해를

    개인적으로는 무엇보다 오랫동안 잡고 있던 책 원고를 모두 넘기고 출판 기념회를 하는 일정을 새 수첩에 적고 싶습니다. 또 올해 틀어진 관계들을 바로잡아 그들과 술 한잔하며 묵은 감정을 털어버릴 수 있는 일정을 적으면 더욱 좋겠습니다. 이런 바람대로만 한 해 수첩이 채워질 수 있으면 좋겠지만, 세상은 뜻대로 진행되지 않겠지요. 그래도 새해니까 희망을 적어봅니다. 여러분들은 새 수첩에 어떤 일정들을 적고 싶으신가요? 보다 좋은 일정, 희망이 담긴 일정으로 채우시기를 바랍니다.

    새해에는 올해보다 더 좋은 일 많이 하시기를, 일 년 내내 늘 건강하시길 기원합니다. 
    한 해 동안 고마웠습니다.

    박래군
    인권재단사람 소장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