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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래군의 사람살이] 冬花 박래전 추모관을 만드는 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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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冬花 박래전 추모관>을 만드는 심정

    박래군(인권재단사람 소장)



    올해는 제가 인권운동에 입문한 지 30년이 되는 해입니다. 인권운동에서 어떠한 전망도 찾지 못하던 1988년에 만 25년을 같이 살았던 동생 래전이를 저 세상으로 보냈습니다. 그런 뒤에 유가족들의 단체인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유가협)에 들어갔고, 거기서 의문사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유가족들의 농성을 지원하면서 인권운동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첫 번째 전환점


    인생의 전환점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제게 첫 번째 전환점은 재수해서 대학에 들어갔던 만 20세의 1981년입니다. 광주학살을 접하지 않았다면, 저는 아마도 소설을 쓰는 직업문인의 길을 가고 있었을지 모릅니다. 지식인의 시대적 사명이 강조되던 당시의 상황에서 자기 나라의 군대가 자기 나라 국민을 잔인하게 죽인 학살극을 외면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 후 우리 형제의 삶은 바뀌었습니다. 한 해가 지나 숭실대학교(당시는 숭전대학교)에 입학한 동생도 저와 똑같이 문학회에 들어갔고, 광주를 접했고, 학생운동의 길을 갔습니다. 다만 저는 소설을, 동생은 시를 쓰는 것만 달랐습니다. 우리 형제의 삶은 순탄할 수 없었습니다. 형이었던 저는 강제징집, 위장취업을 지나 해고자가 되었고 감옥으로 갔습니다. 동생은 불심검문에 걸려 지도휴학 처분을 받았고, 군에 갔다 와서도 복학과 휴학을 반복하며 연행되고 구류 등을 살다가 1988년에 인문대 학생회장이 되었습니다. 


    두 번째 전환점

    우리 형제에게 1980년대는 치열했고 지독했지만, 동생의 죽음까지 겪을 줄은 몰랐습니다. 1988년 제 동생 박래전은 6월 4일, 학교 학생회관 옥상에서 “광주는 살아 있다! 군사파쇼 타도하자!”(당시는 군사독재, 군부독재라는 말과 함께 군사파쇼라는 말도 많이 썼습니다.)고 외치며 자신의 몸에 시너를 붓고는 불을 붙였지요. 그리고 이틀 동안 고통의 시간을 버티다가 6월 6일 정오경에 저 세상으로 떠났습니다. 


    동생의 죽음은 인생의 두 번째 전환점이었습니다. 그 뒤 30년 동안 참혹한 죽음들을 많이도 봤습니다. 유가협의 사무국장을 지낼 때인 서른 살 전후에는 전국에서 분신 등으로 자결한 이들의 죽음의 현장으로 뛰어야 했고요, 군대 같은 곳에서 의문사 당한 일이 있으면 달려가야 했습니다. 분신하고, 목매고, 투신하고, 총에 맞아 죽은 이들의 장례를 도맡아 치르다 보니 어느새 저에게는 ‘재야의 장의사’란 별칭이 따라 붙었습니다. 유가협을 그만 두고 ‘인권운동사랑방’이란 인권단체에 20년 가까이 적을 두고 활동을 할 때도 국가폭력, 국가에 의한 죽음과 관련한 일들을 많이 했던 것 같습니다. 


    동생의 삶을 복원하며


    그러다가 정작 제 동생의 추모사업은 뒷전으로 밀어두고 말았습니다. 30년 동안 숭실대의 동생 선후배, 동료들은 매년 그날을 잊지 않고 마석 모란공원을 찾아주었습니다. 한 해도 거르지 않고 그리 찾아준 이들에게 너무도 고맙습니다. 그럼에도 해가 거듭될수록 불안했던 게 있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동생의 유품이나 그가 남긴 생의 흔적들은 가뭇없이 사라져 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 시대를 치열하게 살다간 동생의 흔적일랑 제대로 남겨두어야 한다는 욕심이 있었습니다. 아니, 그래야 할 것 같았습니다. 


    한 달 전쯤에 학교 박래전기념사업회 사무실에 있던 유리상자를 가져왔습니다. 그 안에 동생이 분신하던 당시에 입었던 옷가지와 구두가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꺼내보지도 않았던 물건들입니다. 당시에 인기가 있었던 ‘두발로’ 상표의 구두는 밑창이 다 바스러져서 가루가 되었습니다. 뭉쳐진 옷가지를 펼치니 불에 타고 남은 옷가지 조각들, 손수건과 양말이 나왔습니다. 그리고 아마도 불을 붙일 때 썼을 것으로 보이는 빨간색 라이터….


    먼저 유품 복원작업을 한 이한열기념사업회 후배들을 통해 복원 전문가들을 만났습니다. 지금 구두와 옷가지와 유서와 시를 적은 원고들은 복원과정을 거치고 있습니다. 6월 5일 개관하는 <冬花 박래전 추모관>에 전시됩니다. 더 많은 유품과 원고들은 이후 더 작업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시대를 넘는 대화의 공간


    이런 사업을 위해 추모위원을 모으는 일을 하면서 한편으로는 ‘내가 왜 이 일을 하고 있지?’ 하다가도 ‘내가 아니면 누가 하겠냐?’ 싶어 심경이 복잡합니다. 동생의 유품을 꺼냈을 때 솔직히 마음에 동요가 일었습니다. 30년 동안 나는 왜 이 유품들을 살펴보지 않았을까, 좀 더 일찍 서두를 걸 하는 후회도 들었습니다. 유가족이 직접 나서서 추모위원이 되어 달라고 부탁하기가 망설여지기도 하지만, 다행히 많은 분들이 흔쾌히 추모위원으로 참여해주셔서 무사히 추모관을 개관하게 될 것 같습니다. 추모위원으로 참여해주신 분들과 복원작업에 귀한 시간을 내어주신 분들의 이름은 추모관 한 면에 적어서 기억하겠다고 다짐합니다.  


    작은 추모관이지만, 이곳이 1980년대를 치열하게 살다간 학생운동가이자 시인인 박래전을 세상 사람들이 만나는 공간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이 공간에서 시대를 넘는 대화가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많은 분들이 만들어주신 소중한 공간, 잘 가꾸어 가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첨부파일 00503528_20180528.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