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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람살이 / 201706] 6월의 하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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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월의 하늘

     

    박래군(인권중심 사람 소장)


     

    30년 전 6월에 대전교도소에 있었습니다. 징역 2년형을 확정 받아서 1년을 막 넘게 살던 시절이었습니다. 중순 쯤 지났는데 면회를 다녀온 한 분이 제게 살짝 귀띔을 해주셨습니다.


    “4.19 때보다 데모가 크게 일어나고 있대.”


    그 말을 들은 저의 반응은 에이, 그럴 리가.’였습니다. 세상과 격리된 지 1년이 넘었지만 종종 바깥세상 소식을 들어왔던 터라, 제 짐작으로는 어림없는 일이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1986년에 전두환 독재가 절정을 치달았습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조직사건이 터졌고, 10월말 건대항쟁건으로 운동권의 씨가 다 말랐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19871월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박종철이 고문으로 죽었습니다. 그럼에도 4.13호헌 조치를 통해서 강압통치를 이어가겠다고 선언한 정권이었습니다. 민주화운동은 정권의 서슬 퍼런 탄압 앞에 기를 펴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했고, 그런 상황에서 학생들이 데모를 할런지는 몰라도 ‘4.19보다 더 크게라니요.


    하지만 그날부터 교도소 분위기가 달라졌습니다. 교도관들이 전투복 차림으로 근무를 섰고, 우리를 대하는 태도가 살가워졌습니다. 정치상황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곳은 감옥입니다정권이 바뀌거나 하면 태도가 180도 바뀌는 곳임을 여러 번의 감옥살이를 통해서 경험한 바 있습니다. 그리고 며칠 뒤, 매우 익숙한 냄새를 맡고 재채기를 연신 해대야 했습니다. 너무도 반가운 독가스다름 아닌 최루탄이었습니다. 거리 시위할 때마다 최루탄 독가스에 눈물콧물 다 쏟아내었던 그 기억아하 대전에서도 큰 시위가 있구나, 시내에서 멀리 떨어진 교도소까지 그 냄새가 날 정도면 정말 큰 시위가 벌어지고 있구나.’ 생각했습니다.

     

    30년 전의 6


    6월 항쟁을 저는 감옥에서 겪었습니다. 역사의 현장에서 함께 싸웠어야 했다는 아쉬움이 이후에도 남았습니다. 6월 항쟁은 629일 노태우의 선언(6.29선언)으로 막을 내렸습니다. 노태우의 약속대로, 감옥에 갇혔던 우리는 이한열의 장례식 전날 가석방으로 풀려났습니다. 이한열 장례식에 가려고 했지만 시골에 부모님을 뵈러 갔다가 상경하지 못했습니다. 요즘 같으면 교통편이 좋으니 금방이지만 30년 전에는 그렇지 못한 사정도 있었습니다.


    장례식에는 백 만 명이 모였습니다. 당시 문익환 목사님의 추도사를 많은 사람들이 기억합니다. “전태일 열사여!” 로 시작된 목사님의 호명은 절규였습니다. 백 마디 말보다도 더 큰 전율이었습니다. 장례식장에 모였던 이들도, 장례식을 TV로 지켜보던 저도 전율하면서 울었습니다. 이한열까지 26명 열사들의 이름을 오열 하듯이 불렀던 그 추도사는 두고두고 가슴에 남았습니다.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2017518, 광주 5.18기념식장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기념사를 읽어내려 갔습니다. 5.18의 진상규명, 전남도청의 복원, 헌법 개정 시 5.18 정신의 헌법 전문 반영을 약속했고, ‘임을 위한 행진곡의 의미를 짚었습니다. 대통령의 말 한 마디 한 마디는 해원이었습니다. 얼마나 듣고 싶었던 말이었던가요? 박수가 이어지는 가운데 대통령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발언을 계속했습니다.


    저는 오늘, 오월의 죽음과 광주의 아픔을 자신의 것으로 삼으며 세상에 알리려했던 많은 이들의 희생과 헌신을 함께 기리고 싶습니다.”고 말을 꺼내더니 박관현, 표정두, 조성만의 이름을 호명했습니다. 그리고는 “1988광주는 살아있다고 외치며 숭실대 학생회관 옥상에서 분신 사망한 스물다섯 살, 숭실대생 박래전.”을 말하는 게 아닙니까.


    , 저는 그때 세월호 유가족들과 같이 있지 않았다면 엉엉 울었을지 모릅니다. 29년 만에 공식석상에서 호명된 동생의 이름가슴 벅찬 감동을 안고 그날을 어떻게 보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30년 전 6월 항쟁이 있었고, 그 다음 해에 동생 박래전은 6월에 자신의 몸에 불을 붙였습니다. 30년 전 감옥에 양심수로 수감되어 있던 저는 래전이의 죽음 후에는 유가족으로 살고 있습니다. 래전이가 가던 그 뜨거운 여름의 땡볕과 지열을 기억합니다. 동생을 묻으며 민중의 새 세상을 만들 때까지 울지 않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매년 동생의 산소에 가면서 미안했습니다. 약속을 지키지 못한 형이니까요. 래전이와 약속을 지키려고 했는데 아직은 멀었습니다. 민주주의는 한 발 다가가면 한 발 더 뒤로 멀어지는 그런 것이기도 했습니다.

     

    새로운 6월의 하늘을


    우리는 올해 촛불혁명으로 부패한 독재자를 권좌에서 끌어내렸고 새로운 민주정부를 보고 있습니다. 올해의 6월은 30년 전의 6월과 같아서는 안 되겠지요. 시민들이 최루탄과 전경, 백골단의 폭력에 쫓기며 거리에서 항쟁한 결과를 고스란히 보수 정치권에 넘겨주고 밀실에서 개헌하도록 만들었던 것에 그쳐서 사회경제적 민주화까지 밀고가지 못한 후과를 우리는 30년 동안 온몸으로 겪었습니다. 올해는 그런 전철을 밟지 않아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할까 고민입니다.


    올해 6, 30년 전의 6월을 기억하는 행사들이 넘쳐날 겁니다. 그런데 그런 행사가 항쟁의 역사를 박제로 만드는 행사여서는 안 될 텐데 하는 걱정이 앞섭니다. 6월의 하늘은 지난겨울 어둠을 밝혔던 촛불로 새롭게 밝혀져야 합니다. 늘 새롭지 않으면 낡게 되는 것, 그게 세상사의 이치인 것 같습니다.


     

      
첨부파일 추모.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