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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권프로젝트-온] 여순항쟁 역사 다시보기 탐방사업
    • 작성일
    • 2018.12.14
  • "학살을 거부한 군인들, 평화의 관점에서 여순항쟁 다시보기"
    여순항쟁 70주년 기념 여순항쟁 역사 다시보기 탐방사업

    글 | 신재욱(열린군대를위한시민연대)


    2018년 10월 19일은 여순항쟁 70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한 주 전인 10월 13~14일, 열린군대를위한시민연대는 ‘학살을 거부한 군인들’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여수를 방문했다. 여순항쟁지를 돌아보고 강의를 듣고, 유족들과 만남을 가지며 여순항쟁에 대한 평화적 관점에서의 역사를 다시 정립하기 위함이었다. 

     

    첫 일정은 여순항쟁지 답사였다. 첫 방문지는 옛날 봉기를 일으켰던 14연대 군인들이 주둔하던 곳이었다. 일제 때는 일본 해군의 기지로 쓰인 곳이라 했다. 주둔지 바로 앞은 가막만이라는 바다였는데, 해변에는 아직까지 수륙양용 비행기가 사용했던 활주로와 격납고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주둔지는 현재 한화(한국화약)의 화약공장으로 쓰이고 있어 출입이 불가하다고 했다. 예전에 14연대 군인들이 쓰던 굴뚝이나 창고 등이 그대로 보였다. 70년 동안 세상이 많이 바뀌었다지만, 지금 이곳에서 바라보는 과거의 풍경은 별로 변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해설을 맡은 이오성 여수지역사회연구소 운영위원은 주둔지와 바다 사이에 난 큰 도로의 원래 이름이 통일로로 내정됐었는데, 길을 내고 보니 바뀌어버렸다고 했다. 아직까지 14연대 군인들의 염원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다. 주둔지의 스산함과 여수 바다의 아름다움을 뒤로 하고 다음 방문지로 향했다.



    멈춘 곳은 지금은 이순신 광장으로 불리는 광장이었다. 우리가 서 있는 곳은 원래 바다라고 했다. 이순신 광장 너머 얕은 오르막이 뻗어 있는 저 곳에서 70년 전 인민대회가 열렸다고 했다. 당시 여수 인구가 8천 명 정도 됐다고 했는데, 5천 명 이상이 집회에 참석했다고 했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곳이 그때와 많이 다르긴 하겠지만, 5천 명 이상이 모였다면 정말 꽉 찼을 것 같았다. 과연 어떤 마음으로 그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이곳에 모였을까. 그 마음을 꼭 알고 싶었다. 후에 인민대회에 참석했던 사람들은 거의 다 가담자로 색출되어 죽임을 당하거나 장기징역을 살았다고 했다. 

     

    지금은 중앙초등학교로 불리는 종산국민학교는 당시 가담자 색출이 이뤄졌던 곳이다. 당시 토벌군으로 왔던 김종원이라는 일본군 출신의 군인이 일본도로 사람을 무자비하게 죽였다고 했다. 학살의 장소에는 당시에도 있었던 나무의 잘린 그루터기가 남아 있었다. 그렇게 자르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다는데, 학교 측이 그냥 잘라버렸단다. 이후 들었던 강의에서 주철희 박사는 이곳이 시민군이 토벌군을 막아낸 곳이었다고도 했다. 학살의 기억은 물론이고 항쟁의 기억 또한 기억되지 않고 있었다. 아무리 같은 시간대에 살고 있더라도 서로 다른 역사를 기억한다면, 아마도 다른 시절을 살고 있는 것이다. 

     

    만성리로 향했다. 그곳에는 형제묘와 위령비가 있었다. 두 곳 모두 사람들이 많이 죽임당한 곳이다. 묵념을 했다. 이곳도 바로 앞이 바다였다. 바다 너머 저 멀리 보이는 애기섬은 보도연맹원들이 수장당한 곳이라고, 70년 만에 처음으로 9월에 위령제를 지냈다고 했다. 125명이 25명씩 다섯 조로 묶여 불에 타 죽어 묻힌 곳이 형제묘였다. 죽어서라도 형제처럼 서로 의지하라는 뜻에서 붙인 이름이었다. 형제묘에는 장남인 정기만이 묻혀 있고, 그 바로 앞 작은 묘에는 막내인 정기옥이 묻혀 있다. 셀 수 없이 많은 사연이 70년이 지난 아직까지도 반란이라는 이름 아래 밝혀지지 못하고 있다. 만성리 위령비는 2009년에야 세워졌다. 자그마한 위령비다. 그전까지 유족들은 그 작은 위령비도 없이 희생자 추모제를 지내왔던 것이다. 준비해둔 나무토막에 글씨를 써 위령비 주변 철조망에 매달았다. 서른 개도 채 안 되는 수였지만,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전달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저녁에는 주철희 박사의 강의를 들었다. 약 한 시간 반 가량의 강의를 이 글 안에 다 요약할 순 없겠지만, 꼭 새겨야 할 내용이 많았다. 역사를 동등하게 봐야 한다는 것. 광주항쟁 당시 전남도경국장이었던 안병하는 시민에게 발포하라는 계엄사령관의 명령을 거부했고, 고문의 후유증으로 죽었다. 2003년에 국가는 그의 행동이 올발랐다고 인정해 그를 국가유공자로 지정했다. 여순항쟁은 그렇지 않았다. 똑같이 제주도 동포를 학살하라는 명령을 거부했음에도 아직까지 국가는 당시의 봉기를 반란이라고 이름한다. 

    여순항쟁 이후 국가보안법이 제정되었고 이후 대한민국의 역사는 오래도록 군부독재의 역사였다. 국가의 최고수반을 통수권자로 둔 군에게 없는 것은 자정하고 반성하는 태도다. 내부고발자는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 그것이 아직까지도 많은 사회문제의 원인이 되고 있다. 미군정을 등에 업고 권력을 잡은 이승만 정권은 일제 때보다 더한 폭정을 저질렀다. 거기에 저항해 떨쳐 일어난 군인들과 시민들이 있었다는 것. 그리고 국가가 그들을 무참히 짓밟았다는 것. 이 모든 것이 대한민국의 역사다.



    마지막 일정인 유족 간담회 전에 여순항쟁 전시를 관람했다. 주철희 박사가 내용을 준비한 전시였다. 방대한 양의 사료와 사진들을 보면서, 한 사람의 헌신적인 연구자가 얼마나 많은 일을 할 수 있는지 다시금 알게 되었다. 유족 간담회에서 자세히 들을 수 있었던 것은 여순항쟁 특별법 제정의 진행과정이었다. 다른 과거사 문제의 희생자들처럼, 여순항쟁 역시 70년 전의 일이었기에 하나둘씩 유족들이 세상을 떠나고 계신다 했다. 이번 국회의 남은 임기인 1년 6개월 안에 특별법이 제정되지 못하면, 이후에는 힘들지 않을까 생각하신다고 했다. 우선 제정이 되어야 평화공원 조성과 명예회복과 배·보상 등 유족을 위한 과정이 진행된다. 여순항쟁은 지금도 여전히 진행 중인 역사다. 



    1박 2일간의 짧고 바쁜 일정이었다. 무엇이 남았고 더 무엇을 이어갈 수 있을까. 답사에 참여했던 원주신 님의 기행문 중 일부분으로 이 글을 갈음하려 한다.

    역사의 답사지를 밟는다는 것은 마음에 발자국을 남기는 것과 같은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70년 전의 그때와 지금의 나의 삶으로 이어진 발자국. 현재의 나는 이렇게 살아남아 살아가고 있는데 여전히 불합리와 부당한 일은 사회에서 일상에서 발생하는데 나는 또 어떤 발자국을 남기고 나아갈지. 여순항쟁을 기억하며 우리에게 새겨진 발자국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가 원하는 미래에 가 닿을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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