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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권프로젝트-온] 의문사진상규명운동 30년의 기록: 의문사유가족의 사진영상 아카이브 구축
    • 작성일
    • 2018.01.15
  • 의문사진상규명운동 30년의 기록 : 의문사유가족의 사진영상 아카이브 구축


    잃기 위해 시작한 의문사유가족 아카이브, 고민과 출발 
    (고 정경식의) 김을선 어머님, 정경연 누이 댁을 방문하며 


    장민경(이내창기념사업회 의문사유가족 디지털아카이브 사업단)

    87년에 대한 기억이 나에게는 없다. ‘문민정부’가 시작된 해에 태어나, 어릴 적 자주 접한 단어는 '청산', '기념'과 같은 것이었다. 의문사라는 것은 그 사이 어디 즈음 위치한 것이었고, 꽤 오랫동안 나에게, 아니 어쩌면 ‘우리’에게, 그것은 어디까지나 과거의 죽음이었다. 두세 명을 제외하고는 이름도 얼굴도 몰랐다. 최루탄에 맞았다거나, 어느 날 아침 물 위로 시체가 떠올랐다는 ‘이야기’에만 익숙했을 뿐이다. 당대 폭압적인 정권의 거울상, 혹은 그림자로 생각하고 넘어갔을 뿐, 해당 인물들에 대해 더 깊이 관심 가진 적은 없었다.  

    다만 몇 년 전 본 다큐멘터리를 통해, 의문사진상규명을 위해 활동한 조사관들의 존재는 알 고 있었다. 이내창기념사업회에 속한 몇몇 선배들을 만나게 된 시기도 그 즈음이었다. 이후 의문사가 특정한 시절에 머무른 채 끝난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 정도는 어렴풋이 인지할 수 있었다. 그렇다 해도 익명의 죽음들, 규명되지 않은 진실, 그것을 밝히려는 사람들이 최근까지 있었다, 딱 거기까지가 내가 아는 사실의 전부였다.

    그런 나에게 아카이브 활동을 함께 해보지 않겠냐는 제안이 원옥 선배로부터 왔다. 좋다고는 했지만, 시작하는 시점에서 드는 걱정은 꽤 컸다. 다만, 사라질 증언을 기록하는 것은 필요한 일이라는 당위와, 그러한 일에 함께 해보고 싶다는 욕심, 그동안 인지하지 못했던 것을 같이 ‘잃고’ 싶다는 마음이 조금 더 앞섰다. 그 시절에 대한 기억이나, 상실한 것이 없는 나도, 슬퍼하는 사람들 옆에서 '구체적으로' 애도하고 싶었다. 그래서 만나고 싶었다.


    유가족 방문에 앞서

    사전 교육 일정이 끝나고, 본격적으로 아카이브 일정을 짜기 시작했다. 방문 순서는 건강상태, 나이 등을 기준으로 정해졌다. 첫 면담 대상은 고 정경식의 김을선 어머님이었다. 건강도, 기억력도 많이 안 좋아지셨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김을선 어머님뿐만 아니라 많은 유가족들이 비슷한 상황에 처해 있다고 했다. 남은 평생을 의문사한 자식의 삶뿐만 아니라, 진실을 덮는 현실을 증언해온 분들인데, 시간 앞에서 무력해지는 듯해 안타까웠다. 

     
    ▲ 사전교육_의문사유가족 면담을 진행하기 위해 아카이브사업에 참여한 구성원들이 의문사사건에 대해 공부하고 있다. 
    출발을 며칠 앞두고 구술사에 대한 간단한 세미나에 참여하며 그런 고민이 들기도 했다. 

    누군가의 '유가족'이라는 정체성으로 출발하는 '생애사'는 어떤 물음과 답변에 중심을 두고 이뤄져야 할까? 개인의 전 생애를 쓰는 것일까? 그런데 결국엔 의문사 당사자와 관련된 이야기가 중심이 되는 것은 아닐까? 그렇게 되면 의문사 당사자의 삶에 대한 대변, 어떤 경우에는 미화로 머무는 건 아닐까? 이 작업은 구체적으로 어떤 의의를 갖게 될까? 이런 생각들이 부끄럽지만 아직 명확히 정리되지 않았다. 결국 출발하는 날까지도 나는 그 답을 제대로 찾지 못했다. 우선은 이번 구술 작업을 참여하는 과정에서 풀어야하는 숙제 중 하나로 가져가기로 했다. 어쩌면 앞뒤가 바뀐 일이었는지도 모르겠지만….


    5월 19일 마산으로 떠나다 

    출발 시간은 10시, 장소는 합정역 5번 출구였다. 신명철 선배와 조환준 선배의 차에 적당히 나눠 탄 일행은 내려가는 길 휴게소에 잠시 들러 돗자리를 펼쳤다. 안경호 49통일평화재단 사무국장님으로부터 지금까지 전개된 사건 브리핑을 들었다. 사전 세미나를 하긴 했지만, 그때만 해도 난 여전히 이름과 사건, 기관들에 익숙해지질 않았다. 

    고 정경식(고 정경식 ‘열사’라 쓰기엔 뜻풀이 상 괴리감이 느껴지고, 그렇다 해서 단순히 ‘희생자’라 쓰기엔 무력해보여 망설이다가, 우선 호칭 붙이기를 미루기로 했다.)은 마산 대우 중공업에서 민주 노조 운동을 하다 의문사한 노동자였다. 김을선 어머님의 둘째 아들이었으며, 그 위로 아들이 하나, 아래로는 딸이 하나 더 있었다. 그러니까 고 정경식에게는 형과 누이였다. 그는 한 마디로 착한 아들, 동생, 오빠였다. 사전에 읽어간 김을선 어머님의 구술사에도 나왔듯, 그는 어릴 적 총명했고, 동생을 아꼈고, 아픈 아버지의 병간호를 잘 했고, 커서는 잔업까지 꼬박꼬박 다한 후 받은 월급을 집에 보탰다. 언변이 좋아 작업장에서도 소문이 났고 민주노조 준비 과정에서 앞장서서 말하는 경우가 많았다. 자연스레 회사 측에 동조하던 이들과는 적대하게 됐으며, 그 중 임○식이라는 사람과의 충돌로 인한 합의금 문제가 발생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정경식은 임○식의 연락을 받고 나간 후 연락이 두절됐고 9개월 후 유골로 발견됐다. 동네 숲 길 나무 아래에서, 너무나 말끔한 상태였다. 느닷없이, 사건은 일어났지만 책임자는 없었다. 그를 잃은 데서 온 아픔은 한동안 오직 그 가족의 몫이어야 했다.

    도착지에 다와 갈 무렵에는 괜히 불안해져 김을선 어머님의 구술사가 담긴 세미나 자료집을 뒤적거렸다. 가서 실수나 하지 말았으면 했다. 영문도 모른 채 사라진 자식에 대한 마음이 어떠하였을지 조금이라도 가늠은 해보고 싶었다. 스스로 이루지 못해 바라던 꿈들을 투사했는지도, 아들 자체에 대한 사랑이 너무나 깊었는지도 모르겠다. 어찌됐건 결과적으로 그의 죽음으로 인해 간직한 모든 것들을 잃게 되었고, 이로 인해 받았던 상처와 상실감의 정도는 엄청났을 것이라, 짐작해보았다. 동일할 수는 없겠지만, 그 누구든 사랑하는 대상에 대해 보내는 마음과, 잃었던 마음과, 어느 정도는 통하는 것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며, 집으로 들어갔다.  


    투쟁 이후, 남겨진 사람들

    누이 댁에 도착하자마자, 한상 가득 음식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김을선 어머님이 따오신 상추, 정경연 누이가 준비해주신 전, 회, 과일 등이 가득했다. 상다리가 부러질 것 같았다. 감사한 마음과 죄송한 마음이 교차로 들었지만, 입 안에 음식들을 넣은 채 오물오물 거리기 바빴다(너무 맛있었다…). 그 사이 안경호 국장님과 김을선 어머님은 그간 못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앉은 자리에서 곧 수십 년의 세월이 오갔다.

    김을선 어머님은 구술사 책 속에서 그려진 강한 모습이 더 이상 아니었다. 생선 냄새 깊게 밴 옷을 입고 온갖 투쟁 대열 속에서 아들 찾아 달라 외치던 3부 4장에서의 모습, 법정에서 판결문을 찢고, 경찰서장에게 쓰레기통을 퍼붓던 4부 2장에서의 모습. 나는 그 속에서 검고 꼿꼿한 머리에, 주름지고 거친 손, 건조한 입술을 가진 중장년의 강한 여성을 상상했는데, 지금 눈앞에 앉아 계신 분은 차분한 흰머리에 서글서글한 인상을 가진, 80세가 훌쩍 넘으신 작은 할머니의 모습이었다. 나는 밥 생각이 없다, 며 수저를 자주 들지 않으시던 할머니. 

     
    ▲ 경남 진동의 김을선 어머니댁 방문(5월 19일)_어머니는 자식, 손자 같은 아카이브 사업단 단원들을 배불리 먹이고 싶어 하셨다. 
    정작 당신은 이야기를 하느라 한 술도 뜨지 못하셨다.  

     요즘에는 밥을 잘 먹지 못한다고 하셨다. 많은 것이 예전만 못하다고, 기억이 가물가물해지고, 말도 왔다 갔다 한다며 고개를 저으셨다. 김을선 할머니는 여든넷의 나이를 실감하시는 듯 했다. 그 사이 감옥에서 보낸 날은 수십 일이 될 테고, 단식투쟁에 일 년 넘게 버틴 국회 앞 천막 농성까지 합치면, 온전히 건강한 몸일 수가 없으실 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밤늦게 진행한 구술사 과정에서 할머니는 좀처럼 쉬질 않으셨다. 두 시간, 세 시간이 넘도록 계속해서 말씀하셨다. 아직 풀어야할 것이 많았기에, 축적된 시간은 너무 길었기 때문이다. 덥고 답답한 공기 탓에 당시에는 생각 못했지만, 그 자리를 나와서야 나는 조금 알 것 같았다. 김을선 할머니에게는 ‘유가족’으로서의 삶 자체가, 이전까지 살아온 삶의 응축이자 발현이었던 셈이다. 


    ▲ 김을선 어머니 면담(5월 19일)_밤 9시에 시작된 면담은 12시가 다 되어서야 끝났다. 
    어머니의 건강을 염려하여 진행자가 중단을 권했지만, 어머니는 말씀을 멈추지 못하셨다.   


    오래된 과거사, 또는 지금 여기 이야기 

    김을선 할머니는 일제 강점기에 태어났다. 그녀는 딸이라 글을 배우지 못했고, 학교도 들어가지 못했다. 어릴 적부터 ‘똑똑이’라 불리었고 말도 잘했지만 집에서 해야 할 일은 정해져 있었다. 그런 한편 삼촌, 아버지, 어머니, 남편 할 것 없이 성실해도 ‘당하고’ 살다 간 사람들이었다. 구조적으로 못 먹고 못 살던 시절을 지나, 자신들은 그렇게 살게 하고 싶지 않다며 새벽부터 저녁까지 매일같이 생선을 팔았다. 정경식 누이의 말처럼, 그녀는 "내 마치로 옛날에는 공부를 하고 싶어도 여자라서 못 시키는 그런 게 있었으니까 나는 그런 사람 안 만들고 싶어서. 오로지 안 굶기고 내 새끼들 공부 가르치고 하기 위해서" 하루도 쉬지 않았고, 실은 그 때문에 딸의 운동회도 한 번 가보지 못했다. 교육과 생활에 대한 부담을 온전히 개인에게만 지운 사회에서, 어머니와 딸이 누릴 수 있는 몇 가지 행복은 미래로 유예될 수밖에 없었다. 

    정경식의 누이는 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돈을 벌어야했다. "내가 중학교 가면 오빠는 고등학교 가잖아요. 그러니까 내가 안 가야만이 오빠가 할 수 있을 거라 싶고. 나는 여자니까, 오빠는 또 사회생활을 해야 되니까. 하고 싶은 공부를 해야"했기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미싱을 배우러갔다가 본드 냄새를 견딜 수 없어 그만둔 후, 그 다음에는 아는 분 소개로 다른 회사에 들어갔다. 미성년자 신분 탓에 오빠 친구 분의 명의를 빌려 취직했다. 일 마치면 곧바로 집으로 갔던 젊은 시절을 회상한 누이는, 한 번도 놀아보지 못했던 것이 참 아쉽다고 했다. 당시 많은 집들이 그러했을 것이다. 돈이 넉넉하지 못한 집의 경우 특히, 전략적으로 아들이 교육받고, 어머니와 딸들이 그것을 뒷바라지 한 방식이었을 테다. 당장의 생활고를 해결하기 급급한 상황에서, 몸과 머리는 일터와 가족을 벗어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축적되는 한을 달리 풀 수 있는 언어나, 활동을 꾀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고 정경식의 성장과 활동은 이들의 희망을 대변해주기도 했을 것이다. 
     
    "오빠가 이 민주화할라 하는 이유"에 대해 누이는 그렇게 짐작했다. 어릴 때 아버지가 정미소 일을 하러 갔다가 허리를 다쳤지만, 제대로 된 치료도, 보상도 받지 못했다. 사장은 병원비도 안 되는 돈을 어린 큰 아들에게 쥐어준 뒤 도장까지 받아뒀다. 걸을 수 없게 된 아버지의 남은 생을 책임지는 이는 가족뿐이었으며, 그때의 기억은 노동자로서 노조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한 데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라고 말이다.

    김을선 할머니는 이렇게 말했다. "아직 꿈꾸는 기라, 우리가. 우리 맘에는 민주화로 하고 싶은 사람은 마음은 간절한데, 아직 꿈꾸고 있어요." 아직 민주화는 오지 않았다고, 민주화된 세상은 "우리 쪽이 자유롭고, 자유롭다고 감투 이런 게 아니라 마음 포근한 세상"이라고. 


    ▲ 김을선 어머니는 평생 생선 장사를 하며 가족을 먹여 살렸다. 1박 2일의 일정을 끝내고 서울로 올라가는 아카이브 사업단에게 어머니는 하룻밤만 더 자고 가면 안 되냐고 물었다. 죄송하다고 말씀드렸더니 어머니는 황망히 면담을 끝내고 곧바로 학꽁치 회를 뜨기 시작하셨다. 


    구체적으로 함께하기 위해 

    만약, 어느 날 길을 걷다 모르는 분이 의문사 진상규명과, "우리 쪽이 자유로운 세상!"이라고 외치셨을 때, 나는 3초 정도만 주춤거리다 곧바로 스쳐지나갔을지 모른다. 무슨 일인가 궁금하다면 스마트폰을 켠 뒤 검색 정도 했을까. 그분들의 언어가 무엇을 뜻하는 지 좀처럼 모르기에, 외치는 대상의 삶도, 외치는 분의 삶도 아는 바가 없기에 스쳐지나가는 나에게는 그분들을 알아볼 눈과 귀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 과정에서, 유가족의 오래된 삶의 맥락을 조금이나마 파악할 수 있었다. 일단 만났고 들었기 때문에. 그 과정에서 듣게 된 한숨과 바람은, 이제는 결코 쉽게 지나칠 수 있는 것이 아니게 되었다. 그분들이 어떤 삶을 살아왔고 살고 있는지는, 내가 발 딛고 선 시간대와 살아가는 사회와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 사건의 '스토리'만을 아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들이 실재하고 있는지를 안다는 것,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나를 더 이상 관조적인 사람으로 두지 못하게 만든다. 그러니까 '우리 쪽'에서 만들었으면 하는 세상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무엇이 '우리 쪽에 자유롭고, 마음 포근한 세상'인지를, 공감 속에서 구체적으로 고민하게 되는 것이다. 익숙해져 잃은 것인지도 몰랐던 관계, 권리, 감각 같은 것을 상상해보는 것이다.

    멋모르고 뛰어든 이후에야, 나는 앞서 들었던 물음에 대한 답을 얕게나마 찾을 수 있었다. 그분들이 살아온 20년, 30년간의 삶 자체가 피해자/가족이자 운동주체로서, 또는 운동주체이자 피해자/가족으로서의 정체성을 좀처럼 떼어놓을 수 없는 것이었기에, 유가족으로서의 구술생애사라는 것이 가능한 것이구나. 물론 이에 대한 고민이 여기서 그칠 것 같진 않지만, 우선 내가 느낀 것이라 말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일 테다. 처음에 비해 점점 더 익숙해지고 있다. 아카이브 결과물을 낼 때 즈음엔 더 깊이 있게 이 문제들을 이해하고 있었으면 한다. 
    ▲ 의문사유가족 디지털아카이브(http://leenaechang.dothome.co.kr)는 의문사 사건의 사회적 기억을 구성하는 유가족들의 다양한 목소리를 수집·기록·디지털화하고, 이를 모든 시민들이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개방형·참여형 아카이브를 지향함으로써 미해결 인권침해사건의 자료저장실, 인권교육 플랫폼으로 활용되도록 할 것이다.    

     ※ 이 글은 중앙대학교 재학생 장민경이 기념사업회 소식지인 <끈덕지게 어깨동무>(2017, 봄·여름호)에 투고한 것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