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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단, 쉬고] 그냥 떠나서 큰 쉼을 얻다
    • 작성일
    • 2018.09.05
  • 그냥 떠나서 큰 쉼을 얻다


    글쓴이 | 김혜진(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

    떠나는 일은 쉬운 일은 아니다. 대한문 쌍용자동차 분향소는 보수세력들에게 둘러싸여있고 비정규직의 여러 현안도 쉽게 풀리지 않고 있었다. KTX 승무원 교섭은 막바지였지만 안심할 수도 없었다. 내가 있고 없고는 그 문제 해결에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마음이 어찌 그렇던가. 그래도 과감하게 비행기를 탔다. 너무나 오랫만에 맞이한 장기 휴가였다.

    베를린은 월세가 매우 싸다. 사람들은 굳이 집을 소유하려고 하지 않는다. 성인이 된 학생들이 자유롭게 독립을 할 수 있는 이유 중 하나이다. 베를린 상점의 노동자들은 친절하지 않다. 그래도 물건을 사러 온 사람 누구도 채근하거나 불만을 표시하지 않는다. 감정노동을 강요하지 않는 사회였다. 장애인들도 많이 만났다. 엘리베이터가 없는 오래된 집도 꽤 있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는 시설은 어디든 휠체어로 갈 수 있다. 버스와 지하철 모두 자유롭게 탄다. 상점들은 문턱이 없다. 겉핥기로 본 모습이지만 한국사회의 ‘문제’들이 여기에서는 ‘문제가 아니’다. 



    베를린에 동생 네 동네 어귀에는 사람이름과 글들이 빼곡히 새겨진 안내판이 있다. 그 동네에서 유태인 학살로 숨진 이들의 이야기이다. 아프고 부끄러운 과거를 기억하는 공간은 아우슈비츠에만 있지 않다. 현재 살고 있는 곳에서 기억하고 새긴다. 사진에서 보듯이 홀로코스트로 희생된 이들을 기억하는 공간도 베를린 시내 한가운데 있다. 우리는 세월호 참사 이후, 가장 많은 희생자들이 나고 자란 안산에 4.16 생명안전공원을 만들어 생명과 안전에 대한 다짐을 하고자 했다. 기억과 반성의 공간은 바로 우리 삶의 자리여야 한다. 



    베를린은 예술가의 도시이다. 돈이 없는 사람도 오페라를 감상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오페라의 최종리허설 표를 무료로 나눠주고, 10유로짜리 오페라 좌석을 만든다. 베를린에서는 아침에 눈을 뜨기 전에 거리에서 연주되는 악기 소리를 먼저 만나게 된다. 거리를 나서면 바이올린을 연주하거나 플룻을 연주하는 이들과 만난다. 도시 곳곳의 건축물도 관심거리지만, 미술관과 박물관이 많은 것은 정말로 부럽다. 현대미술을 끌고 가는 앤디워홀이나 요셉보이스도 훌륭했지만, 피카소와 샤갈, 쟈코메티, 마티스 등 초현실주의자들의 작품을 만났다. 중세작품과 아프리카 작품을 나란히 전시하여 예술의 보편성을 보여주는 보데박물관에서 큐레이터의 중요성도 깨닫는다. 사진이 바로 박물관섬에 있는 보데박물관이다.  구내셔널갤러리에서 만난 특별전, ‘방랑벽(Wanderlust)’에서 평온한 일상을 내던지고 새로운 세계로 나가는 이들의 용기, 두려움, 피곤함, 설렘, 자연에 대한 공포감도 만난다. 


    ‘크리스토퍼 스트리트 데이’ 행진

    휴가 전날까지 정신 없이 일을 하고 바로 비행기를 탔으니 계획 같은 것을 할 여유도 없었다. 운이 좋아 베를린의 퀴어퍼레이드인 ‘크리스토퍼 스트리트 데이’에도 참여할 수 있었고, 미술관도 다니면서 에너지를 충전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여유로웠기에 좋았다. 아침 늦게 일어나 빵에 버터와 잼을 발라서 진한 커피와 함께 아침을 먹었다. 책을 읽고 드라마를 보고 동생과 엄마와 수다도 떨고, 산책도 했다. 식물원에 가기도 하고, 주택가의 고즈넉한 길을 걷기도 하고, 큰 키의 나무들이 울창한 숲길을 걷기도 하고, 문 닫힌 시내 상가들 사이를 걷기도 했다. 걷고 나면 몸에 다시 활력이 생기는 것 같다. 베를린에서의 산책은 선물이었다.


    베를린의 흔한 산책길, 식물원

    특별한 이유도 목적도 없는 휴가였기 때문에 더 잘 쉴 수 있었다. 서울에 돌아온 이후 몸과 마음이 쉽게 적응되지 않지만, 그래도 급하지 않게 천천히 시작하려고 한다. 인권활동가들을 지원하는 인권재단 사람의 <일단, 쉬고> 를 통해 좋은 휴가를 보낼 수 있었다. 더 많은 활동가들이 이런 기회를 갖게 되기를 바란다. 세상은 ‘내‘가 없어도 움직이고, ‘내‘가 조바심내지 않아도 앞으로 나아간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되니, 쉼의 필요성이 더욱 강해진다. 모두 잘 쉴 수 있게 되기를. 

    <일단, 쉬고>는 쉼과 재충전을 위해 활동가 스스로 기획한 여행, 취미활동 등 인권활동가 개인 프로젝트를 지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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